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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의 자격] ④“이력은 숨기고 판단은 맡긴다”…이사 정보공개, 한국만 ‘간접 공개’

▷ 범죄·제재 이력은 빠진 공시…투자자는 ‘핵심 정보’ 없이 선택
▷ 미국·홍콩은 상세 공개…“정보 수준 자체가 다른 시장”

입력 : 2026.04.09 11:06:00
[이사의 자격] ④“이력은 숨기고 판단은 맡긴다”…이사 정보공개, 한국만 ‘간접 공개’ (일러스트=챗GPT로 생성된 이미지)
 

[위즈경제] 조중환 기자 = 이사 자격 규제의 공백 못지않게, 투자자가 이사 후보를 판단할 수 있는 정보 역시 충분히 제공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수민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의 ‘이사 자격 제한 및 정보 공개 제도의 국제 비교와 개선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이사 후보자 정보 공개 제도는 주요국과 비교할 때 정보의 범위와 구체성 측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 제도는 상장회사가 주주총회를 개최할 때 이사 후보자의 일부 정보를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체납 여부, 부실기업 재직 이력, 법령상 결격사유 해당 여부 등이 대표적인 항목이다. 여기에 경력, 추천인, 회사와의 거래 관계 등 기본적인 인적 사항도 포함된다.

 

겉으로 보면 일정 수준의 정보 공개 체계를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투자 판단에 핵심이 될 수 있는 정보는 빠져 있다. 대표적으로 범죄 이력이나 규제기관의 조사·제재 이력 등은 직접적으로 공개되지 않는다. 결격사유에 해당하는지만 표시될 뿐, 어떤 사유였는지는 드러나지 않는 구조다.

 

이 때문에 투자자는 이사 후보자의 과거 행위나 위험 요소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고, 설령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수준이나 성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보고서는 이러한 방식이 ‘간접 정보 중심 공시’라는 한계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정보가 존재하는지 여부만 제공할 뿐, 그 내용 자체는 공개되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검증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면 해외 주요국은 이와 다른 접근을 취하고 있다. 미국은 이사 후보자가 지난 10년간 연루된 파산, 형사 사건, 법원 판결, 규제 위반 이력 등을 구체적으로 공시하도록 요구한다. 단순히 해당 여부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어떤 형태로 연루됐는지까지 상세하게 공개하는 방식이다.

 

 

생성형 AI(제미나이)의 도움을 받아 시각화하고 기자가 최종 검토 및 확인해 제작한 그래픽입니다

 

홍콩은 한층 더 나아간다. 범죄 이력, 파산, 규제기관 조사 및 제재 이력뿐 아니라 내부자거래 관련 이력까지 세부 사항을 포함해 공시하도록 요구한다. 공시할 내용이 없는 경우에도 ‘해당 없음’을 명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보의 공백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구조다.

 

싱가포르는 한국과 유사하게 항목별로 해당 여부를 표시하는 방식이지만, 그 범위는 훨씬 넓다. 범죄 전력, 민사 책임, 규제기관 조사 이력 등 10개 이상의 항목에 대해 투자자가 판단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처럼 주요국들은 이사 후보자의 과거 이력을 ‘투자 판단의 핵심 정보’로 보고,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공개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 반면 국내 제도는 사생활 보호나 과도한 정보 공개에 대한 우려 등을 이유로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단순한 공시 방식의 차이를 넘어 시장의 정보 비대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투자자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장과, 제한된 정보 속에서 선택해야 하는 시장은 근본적으로 다른 신뢰 구조를 갖게 된다.

 

특히 상장사의 이사는 기업의 전략과 의사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그 과거 이력은 단순한 개인 정보가 아니라 투자 판단의 중요한 요소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정보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는다면, 투자자는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결국 현재 제도는 ‘정보는 최소한으로 제공하고, 판단은 투자자에게 맡긴다’는 구조를 띠고 있다. 그러나 판단의 전제가 되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투자자의 선택이 얼마나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정보 공개는 규제와 자율 사이에서 가장 현실적인 균형 지점이 될 수 있다. 자격을 강하게 제한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정보가 제공된다면 시장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는 그 최소한의 조건조차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알려주지 않는 대신 선택은 맡긴다’는 구조는 책임을 시장에 넘기는 방식에 가깝다. 결국 투명성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에 가깝다. 투자자가 알아야 할 정보를 숨긴 채 신뢰를 기대하는 것은, 시장의 기본 원리와 맞지 않는다.

 
조중환 사진
조중환 기자  highest@wisd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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